세상에는 참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지요.
출처: https://thechang.tistory.com/?page=7 [신상품과 아이디어, 서비스:티스토리]
그런데 이게 실제 생활에서는 꼬이기도 합니다.
특히 별생각 없는 경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인.(비포 앤 애프터)
중국 사인 (어디로 가라고?)
오늘은 이정도.
세상에는 참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지요.
출처: https://thechang.tistory.com/?page=7 [신상품과 아이디어, 서비스:티스토리]
그런데 이게 실제 생활에서는 꼬이기도 합니다.
특히 별생각 없는 경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인.(비포 앤 애프터)
중국 사인 (어디로 가라고?)
오늘은 이정도.
살아가는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매일 우리는 돈을 내고 무언가를 구입한다. 상품을 사고 파는 기준은 가격이다. 소비자들은 철저히 가격에 ‘순종’해야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하지만 어느날 문뜩, 아주 잠깐이지만 묘한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이 것의 원가는 얼마란 말인가.’ 물론 이걸 따진다고 가격을 바꿀 입장은 아니다. 그래도 알고는 싶다. 실생활에 밀접한 가격과 원가를 꼼꼼히 살펴본다.
주유소와 개스값의 상관관계
주유소와 개스값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주유소는 3만 갤런짜리 탱크를 갖고 있다. 개스는 옥탄가 87과 91을 반반씩 저장하는데 89를 원하는 고객에게는 즉석에서 혼합해 제공한다. 대부분의 개솔린 요금은 오후 6시에 정해진다. 왜냐하면 주유소로 출발하는 도매상의 기준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때 값이 오르면 주유소도 따라 올린다. 9000갤런 탱크차 한 대당 150~250달러의 배달료가 따로 징수된다.
결국은 국제사회 각종 사건사고를 핑계대는 정유사의 가격추이에 따라서 개솔린 값은 결정된다. 값이 올라도 주유소가 떼돈 버는 일은 없다. 정유회사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몇 군데 주유소가 박리다매를 하고 있긴 하다. 어떻게 가능할까. 주유소에 도착한 개스가 지하 탱크에 저장되면 일단 부피가 준다고 한다. 미처 부피가 줄기 전에 많이 팔면 되는 것이다. 이런 주유소에서 운전자가 개스를 가득 채운뒤 하룻밤 사이에 조금 줄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유회사 사전에 적자는 없다
비즈니스가 항상 흑자일수만은 없는데 메이저 정유회사들은 절대 적자가 발생할 수 없다. 시장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고 심지어는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솔린 수요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각종 연휴에는 무조건 값을 올린다. 대부분 미국인들의 여행문화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수익은 극대화된다. 이는 산지의 원유 가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타운 '3달러 택시' 손해본다?
LA한인타운 '3불 택시'의 개스값은 어떻게 될까. 3달러 구역은 남북 베벌리~올림픽 동서 후버~윌턴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거리인 베벌리+윌턴에서 올림픽+후버로 거리는 대략 3.4마일이다. MPG가 20일 경우 1마일당 18.5센트로 운행거리 3.4마일은 62.9센트가 나온다. 다시 말해 3달러 지역에서 가장 먼거리를 달려도 개스값만 보면 63센트 정도다. 물론 여기에 인건비 자동차 감가상각비 더해 3달러는 원가 수준이다. 1달러의 팁이 중요한 이유다.
1갤런 원가는 얼마?
발렌시아 거주 이경모씨의 출근길은 31마일이다. 그가 운전하는 차(도요타 캠리)의 MPG(갤런당 마일수)가 31. 그는 이론적으로 출근에만 1갤런을 쓰는 셈이다. 퇴근도 해야 하므로 하루 2갤런 사용.
이씨의 하루 개스값은 7달러40센트(=3달러70센트 X 2). 여기에는 연방 및 주정부 세금 88.8센트(12%), 정유 비용 96.2센트(13%), 주유소 주인이나 정유회사의 유통 및 마케팅 비용은 51.8센트(7%). 가장 중요한 원유값은 5달러2센트(68%)다.
하루 개스값이 7달러40센트라면 1개월 평균 22일 근무하므로 162달러80센트, 1년이면 1953달러다. 예상 밖으로 얼마 되지 않아서 놀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자동차 회사에서 광고하는 MPG에 따른 것이다. 실제 MPG는 더 낮기 마련이고 로컬구간이 길면 더 낮아진다.
한국과 미국의 개스값을 비교해보면 그래도 미국이 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1갤런은 3.785리터다. 한국의 현재 개스값은 리터당 평균 1935원이므로 1갤런은 7323원97전이다. 이를 달러로 바꾸면 6.819(=7323.97/1074원)달러다.
1갤런으로 동일한 MPG를 갖고 있는 차로 같은 거리를 운행해보자. 우선 LA에서 발렌시아까지 31마일은 49.88km다. 한국에선 양재IC에서 동탄IC까지의 거리가 49.8km다. 미국은 3달러70센트. 한국은 6달러81센트가 들어간다.
원산지 원유가격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개솔린 가격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원유(crude oil) 가격. 원유 1배럴(42갤런)을 정제하면 개솔린은 불과 8.3%인 3.5갤런이 나온다. 1배럴이 100달러일 경우, 1갤런은 2달러37센트 꼴. 여기에 각종 세금과 마진을 불이면 3달러38센트가 소비자 가격이 된다.
소비자들은 이 대목에서 혼란스럽다. 산지 원유가격이 100달러가 안 되는 데, 소비자 가격은 3달러38센트(연방 에너지부 전국 통계)가 훨씬 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경우, 세금이 더 높고 환경관련 비용이 추가돼 3달러70센트가 된 상태다.
정유회사 이익의 비밀은 뭘까. 1배럴에 불과 수십 달러였을 때는 가격 변동에 따른 차익을 챙기기에 숫자가 너무 적었다. 하지만 100달러를 넘나들면서 부터는 상승과 하락 폭이 커 손쉽게 차익을 볼 수 있게 됐다.
정유사는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산지 원유가를 들먹이면서 가격을 올린다. 원유가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리는데도 중동사태 소식에 맞춰 실시간으로 가격을 올리는 것이 증거다. 세계 최대 기업 리스트에 정유회사가 많은 이유는 원유 가격 형성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된 김상규씨는 평소에 사용하는 전자 제품을 한국 내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애를 먹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은 220볼트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김씨가 구입해서 미국에서 쓰고 있는 전자제품은 대부분 110볼트용이기 때문이다. 며칠 짜리 여행이라면 완전 충전해서 가져가면 되겠지만 1주일이 넘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인터넷 사용도 마찬가지, IT강국이라지만 단기 방문객에 대한 배려가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최소한 미국 수준으로 IT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스마트폰·아이패드
미국 스마트폰 데이터 로밍비
1MB당 20달러 넘어 조심해야
한국에서 미국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통화를 위한 로밍이 매우 비싸므로 피하라고 권할 수 밖에 없다. 분당 1.99달러, 텍스트는 보내기는 50센트, 받기는 5센트다.또한 데이터 로밍이 안되게 막아놔야 한다. 안 그러면 버라이즌의 경우 1MB당 20.48달러를 부과한다. 이것만 잘 막아놓으면 한국 내 인터넷을 이용해서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는 물론 구글 맵스까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아이패드의 경우도 네이버의 맵앱을 깔아서 사용하면 무료로 한지점과 다른 지점간의 자동차 이동 소요시간, 대중교통 이용시 어떤 노선의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지 등 서비스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한국 내 휴대폰
비싼 렌트폰 요금 부담될 수도
LA서도 대여…국제 로밍 저렴
요즘엔 한국 휴대폰을 인천공항에서 빌려 사용하면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요금은 조금 비싸게 느껴지지만 공항에 내려서 빌리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때 반납하면 된다. 사용하게 될 번호도 이메일로 미리 받을 수 있다. 물론 LA에서는 좀 다른 옵션이 하나 더 있다. 몇곳의 업체가 미주 내에서 한국의 휴대폰을 빌려준다. 요금도 오히려 싸거나 같다. 휴대폰 번호도 미리 받아 앤서링에 남겨서 꼭 연락하고 싶은 사람은 전화를 걸 수도 있는 것은 같다.
다른 점은 비행기 타기 전에 빌릴 수 있다는 것과 값싼 국제 로밍이 가능하다. 또한 귀국후 LA공항에서 반납하므로 인천 공항서 출국심사 후에도 한국전화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
한국내 휴대폰 사용시 주의할 점은 렌트이므로 요금이 생각보다 싸지 않다는 점이다. 데일리 렌트비 이외에 전화 걸때마다 사용료를 따로 내야 한다. 물론 전화카드 사용도 못한다. 자동차 렌트할 때 며칠 빌리는 비용이 월 페이먼트와 맞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바일 인터넷
지난 7월부터 가입자들만 이용
개인라우터 '에그'사용하면 OK
정보에 어두웠던 김상규씨의 동생은 한국 안에서 WiFi 인터넷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한국 거주 친구 말만 믿고 별 준비없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인터넷을 이용한 아이패드와 노트북 사용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원래 한국은 공중 WiFi인터넷이 가장 잘 열려 있던 나라였다. 그러나 지난 7월1일부터 가입자들만 쓸 수 있게 시스템이 바뀌었다. 외국에서 온 단기 방문자는 WiFi 인터넷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며칠 쓰자고 인터넷을 따로 가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족이나 친척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데 이도 마땅치 않다.
물론 한국 내 모바일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에그'라는 프로그램을 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그는 일종의 '퍼스널 WiFi 라우터'로 생각하면 된다. 더구나 속도에 있어서도 WiFi-인터넷이 아닌 고속 와이브로(Wi-Bro)를 이용하므로 3G에 비해 고속인 4G LTE 급으로 즐길 수 있다.
김상규씨는 동생과 달리 LA공항에 있는 휴대폰 대여점에서 에그를 빌려서 한국에 갔다. 에그는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터넷 서비스를 7대까지 중계해주므로 자신이 갖고 있는 노트북, 아이패드, 아이팟 등의 인터넷을 이용하는 모든 모바일 기기를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비용은 하루 10달러꼴이지만 1주일부터는 30% 정도 할인해서 대여된다. 인터넷이 안 돼서 답답한 것에 비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다른 전기 볼티지
미국 110 볼트 vs 한국 220볼트
프리볼트 아니면 사용주의해야
노트북,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모바일 기기는 물론 전기 면도기 같은 여행용 전기기기까지 다행스럽게도 대부분 '프리 볼트'를 채용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기 볼티지의 상이함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프리 볼트는 대개 60~240볼트까지 커버하므로 특별한 몇 가지 제품, 즉 구형 노트북 몇 종류만 빼고는 안심하고 사용해도 좋다. 다만 전기를 꽂는 꼭지의 모양이 달라서 소위 '돼지코'라는 것을 맞춰서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의 고급호텔의 경우 이마저도 벽에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전기 콘센트는 돼지코가 필요하다. 아울러 전깃줄도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항공 여행중 부득이 여권을 분실한다고 해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24시간내에 재발급해준다.
밴쿠버 공항에서 일가족과 미국으로 돌아오던 황정국씨는 아주 난처한 경험을 했다. LA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족들의 짐을 다 부치고 밴쿠버에 나와있는 미국입국 심사관을 앞두고서야 큰 딸아이의 여권이 없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짐을 부치고 보안구역으로 들어서기 전에도 있었는데 다른 가족들의 여권은 다 있는데 큰딸 것만 없었다. 순간 황씨는 이미 부친 짐 걱정 새여권 발급과 관련된 시간 걱정 등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이럴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세계에선 차선이라도 알아두는 게 좋다. 황씨와 같은 경우가 여행중 잊지 못할 최악의 악몽이다.
USA투데이는 여행중 실수로 못찾게 된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없이 여행을 제대로 마칠 수 있는 방법을 보도했다. 우선 정부발급 ID를 분실해도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어떤 여행객은 도서관 카드로 자신의 신분을 입증한 적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 비해서 요즘엔 스마트폰 덕분에 여행객들이 잃어버린 서류가 줄었다고 한다. 많은 경우 전자티켓이 발급되고 상당수 항공사가 모바일 디바이스에 보딩패스를 전송해주기 때문이다. 공항구내 방송으로 보딩패스 잃어버린 손님 찾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전자티켓의 최대 장점은 하나가 잃어버려도 잃어버리지 않는 거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디서나 티켓이나 보딩패스를 재발급 받을 수 있다. 심지어는 탑승을 위한 몸검사를 마치고 보딩 패스를 잃어버린 사람의 경우 항공사가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고 태운 경우도 있다.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렸을 경우는 보딩패스와는 상황이 다르다. 공항 보안 스크리닝을 통과하려면 정부가 발행한 사진이 붙어 있는 ID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회사원은 공항 보안 체크포인트에서 운전면허증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TSA요원은 몇 가지 신분증과 정부가 발행한 ID가 있으면 통과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회사원은 로컬 정부에서 발행한 도서관 카드와 사진이 붙어 있는 코스트코 카드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었다. TSA는 현장에서 로컬 정부의 신분증을 근거로 퍼블릭 데이타베이스에 접근 승객의 신분을 확인했다.
USA투데이는 타지 여행의 경우 기간이 만료된 운전면허증을 소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주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의 백업본도 유용하다.
어떤 펜실베이니아 주민은 주정부에서 발행한 ID를 10달러 더 내고 백업본으로 갖고 다니기도 한다. 그는 가방 한쪽 작은 포켓에 ID카드를 넣어놓고 평소에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경우도 한사람이 드라이브 라이선스와 ID를 동시에 발급받을 수 있으므로 여행시 다른 가방에 백업으로 ID를 소지할 수 있다.
호텔 투숙중 크레딧 카드를 분실했다면 숙박비는 어떻게 할까. 호텔업 협회 관계자는 대부분의 경우 나중에 집으로 청구서를 보내준다고 밝혔다.
해외여행 중 가장 끔찍한 상황이 바로 황씨 가족에게 일어난 여권 분실이다. 이런 경우 사실 별 대책이 없다. 여권을 대신할 긴급 신분 서류는 없다. 일단 지역 관공서에 분실 신고를 하고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신고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면 대개 24시간내에 새로 발급해 준다. 런던에서 한 여행자는 사진을 갖고 있었던 덕에 4시간만에 재발급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럼 밴쿠버 공항에서 12살짜리 큰 딸아이의 여권을 잃어버린 황씨는 어떻게 됐을까. 황씨는 이미 통과한 스크리닝 장소로 돌아가 요원에게 습득한 여권을 찾아달라고 했지만 결국 못찾았다. 하지만 황씨는 숨을 고르고 여권을 넣어뒀던 가방 포켓 가장 깊숙한 곳에서 큰 딸아이의 여권을 찾으므로서 해프닝은 끝났다.
LA타임스의 스캇 윌슨 기자가 제안한 디지털 사진 보관방법 5가지.
1. 외장하드
외장하드는 대략 70달러에서 200달러면 구비할 수 있다.
장점은 엄청난 숫자의 사진 파일을 상당히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컴퓨터와 외장 하드를 함께 보관할 경우, 자연재해나 동시에 도난 당할 경우 모든 추억이 싹 사라진다는 것.
2.CD나 DVD
CD나 DVD로 구워서 보관하는 것도 방법이다. 최소한 몇년은 보관이 가능ㅎ다. 하지만 외장 하드에 비해서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언젠가는 다른 저장 매체로 변환해야 할 지도 모른다. 플로피 디스크를 저장매체로 썼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
3.플래시드라이브
작고 들고 다니기 쉬운 플래시 드라이브는 데이터의 이동에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저장 용량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이동 도구일뿐이다. 저장 매체로는 부담스럽다.
4.클라우드
실제로는 원거리에 있는 안전한 서버를 우리는 클라우드라고 한다. 사진과 다른 여타 파일의 저장에 좋ㄷ. 수십곳의 사이트에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무료로 제공하는 저장용량은 사진을 저장하기에는 부족하다.
5.인화
냉장고에 붙여놓은사진이 기억나시는가. 일부 전문가들은 사진으로 인화해 놓는 것이 디지털로 저장해놓는 것보다 오래갈 것이라고 한다. 인화 해놓은면 수십년후 디지털 디바이스가 잘못되서 사진을 모두 못찾는 경우는 없어진다.
더구나 디지털로 찍은 것을 모두 인화하지도 못한다.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프린트 해놓는 것도 지혜다. 이것이 디지털 라이프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기사 코멘트: scott.wilson@l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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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의 특수성
...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여기서부턴 수학에 관한 내용인데, 관심있는분만 읽어보셔요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 상 에 는 참 재 미 있 는 아 이 디 어 들 이 많 지 요. 그 런 데 이 게 실 제 생 활 에 서 는 꼬 이 기 도 합 니 다. 특 히 별 생 각 없 는 경 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인.(비포 앤 애프터...